서울 용산 리움미술관의 블랙박스에 발을 들이는 순간, 기존 미술관의 익숙한 형식은 사라지고 완전히 새로운 감각의 공간이 펼쳐진다. 고정된 형태의 작품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반응하는 환경 속에서 관람객은 전시와 상호작용하며 작품의 일부가 된다.
지난 2월 27일부터 리움미술관에서 프랑스 작가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 b.1962)의 아시아 첫 개인전 〈리미널(Liminal)〉이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는 피노 컬렉션(Pinault Collection)의 베니스 푼타 델라 도가나(Punta della Dogana) 미술관과 협력해 진행되었으며,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보테가 베네타의 후원으로 개최되었다. 전시에서는 신작 ‘리미널’, ‘카마타’, ‘이디엄’을 비롯해 대표작 ‘휴먼 마스크’, ‘오프스프링’ 등 총 12점의 작품이 공개된다.
인간과 비인간, 그리고 그 경계를 탐구하다
전시 제목인 ‘리미널(Liminal)’은 작가에게 있어 “새로운 존재가 출현할 수 있는 과도기적 상태”를 의미한다. 그는 이번 전시를 통해 “존재할 수 없는 것을 어떻게 상상하고 구현할 것인가?”, “인간과 비인간의 상호 관계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인가?”와 같은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인간과 비인간, 그리고 다양한 생명체가 공존하는 환경을 조성하고, 실시간 환경 데이터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구성했다.
“나는 서사가 선형성을 벗어날 때 흥미를 느낀다.시뮬레이션은 혼돈 속에서 여러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 도구다.”
피에르 위그
전시의 핵심 작품인 ‘리미널’(2024-진행)에서는 얼굴 없는 인간 형상이 등장한다. 이 존재는 전시장에 설치된 센서가 실시간으로 수집한 환경 데이터를 받아들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미묘한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전시장에는 황금색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유령처럼 돌아다니는데, 이 역시 작품의 일부다. ‘이디엄(Idiom)’(2024-진행)이라는 작품은 마스크에 부착된 센서를 통해 수집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생성된 미지의 목소리를 전달한다. 보테가 베네타는 이 퍼포먼스를 위해 작가와 협력하여 의상을 제작했다.
대형 영상 작품 ‘카마타(Camata)’(2024-진행)는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서 발견된 인간 해골을 중심으로 기계가 의식을 수행하는 장면을 담는다. 이 영상은 시작과 끝이 명확하지 않으며, 끝없는 장례 의식을 연상시킨다. 또한, 실시간으로 센서의 데이터를 반영해 편집되는 방식으로 제작되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내 작업은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 원형을 탐구하는 과정이다.”
피에르 위그
인간과 동물,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물다
작가의 대표작 ‘휴먼 마스크(Human Mask)’(2014)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버려진 도시를 배경으로 한다. 이 영상에는 어린 소녀의 가면을 쓴 원숭이가 등장하는데, 실제로 해당 식당에서 종업원으로 훈련받았던 원숭이가 인간이 떠난 뒤에도 반복적으로 배운 동작을 수행하는 모습을 담았다. 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장면은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우리가 인간성을 인식하는 방식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전시장에는 세 개의 수족관도 설치되어 있다. ‘주드람 4(Zoodram 4)’(2011), ‘주기적 딜레마(Circadien Dilemma, El Dia del Ojo)’(2017), ‘캄브리아기 대폭발 16(Cambrian Explosion 16)’(2018)은 생태계의 진화를 탐구하는 작품들이다. 이 수족관들은 자연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자율적으로 변화하는 세계를 구성하며 생명의 불확실성과 진화의 개념을 탐색한다.
관객과 함께 변화하는 전시
이번 전시는 단순히 작품을 감상하는 형태를 넘어, 관람객이 직접 환경의 일부가 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작품은 센서를 통해 관객의 움직임과 전시장 내 조건을 실시간으로 반영하며, 이에 따라 전시 공간과 작품이 끊임없이 변화한다.
리움미술관의 블랙박스와 그라운드갤러리는 관람객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순환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공간적 특성은 전시의 순환성과 유기적인 연결성을 강조하며, 관람객이 전시 속에서 새로운 감각을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리미널〉은 인간과 비인간,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탐구하는 실험적인 전시로, 전시장 자체를 하나의 유기적인 환경으로 변모시키는 시도다. 관람객은 익숙한 세계를 벗어나 새로운 존재와 개념을 마주하게 된다. 리움미술관에서 오는 7월 6일까지, 피에르 위그가 구축한 낯설지만 생동하는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 있다.
피에르 위그 〈리미널〉 전시 정보
• 전시 기간: 2025년 2월 27일 – 7월 6일
• 전시 장소: 리움미술관 블랙박스, 그라운드갤러리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로 55길 60-16)
• 주최: 리움미술관
• 후원: 보테가 베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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