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재단 라 베리에흐(La Verrière)에서 열리는 시리즈 전시 <증강된 솔로(solos augmentés)>의 일곱 번째 주인공은 벨기에에서 활동하는 세네갈 다카르 출신의 아티스트, 펠라지 그바구이디(Pélagie Gbaguidi)다.
잔인한 현실 속
이 전시는 큐레이터 조엘 리프(Joël Riff)가 3개월마다 새롭게 기획하며, 한 명의 메인 아티스트와 그와 연계성을 가진 외부 아티스트들을 초청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번 전시는 ‘앙트르(Antre)’라는 제목으로 펠라지 그바구이디의 작품과 함께 신진 디자인 집단 아이고(Aygo)의 가구, 프랑스 작가 소피 마리 라루이(Sophie Marie Larrouy)의 글, 마리안 베렌오(Marianne Berenhaut)의 조각, 그리고 자메이카 출신 텍스타일 작가 헤시(Hessie)의 자수 작품이 전시된다.
‘앙트르(Antre)’는 은신처 또는 굴을 의미하는 프랑스어로, 작가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단어다. 반권위적이며 반학문적인 태도로 작품을 창조하는 펠라지 그바구이디는 회화, 드로잉, 퍼포먼스, 설치 등 다양한 예술적 실천을 통해 식민주의, 이주, 정체성, 권력 관계 같은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시적으로 표현한다. 그녀의 작품은 현실의 부조리 속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안전한 공간을 상상하며, 상처받고 분열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과정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그바구이디는 도화지를 사용하지 않고 공책에서 찢어낸 종이, 침대 시트, 밀가루 포대 같은 일상적인 재료 위에 아크릴, 연필, 파스텔 등의 안료를 활용해 회화와 드로잉을 완성한다. 단순한 재료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작품 속 문장들은 그녀의 철학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녀는 제국주의와 팽창주의에 반대하며, 우리가 침해한 것과 반환되어야 할 것 사이의 균형을 찾고, 그 결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바른 인식을 촉진하는 것이 목표다.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위협받고 있는 소수민족들의 현실을 반영하며, 예술이 제공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번 전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거주하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첫 번째 개인전이다. 그녀는 전시장을 남쪽으로 12km 떨어진 자신의 작업실에서 대부분의 작품을 제작했으며, 특히 회화와 드로잉에 초점을 맞췄다. 전시장 벽에는 그녀가 오랫동안 탐구해 온 회화적 표현법이 담긴 작품들이 걸려 있으며, 초청된 외부 작가들의 조각, 자수, 가구 작품들은 공간을 유기적으로 구성하며 서로 대화를 나누듯 배치되었다.
1933년 자메이카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예술가가 된 헤시(Hessie)의 자수 작품은 그바구이디의 회화 사이에서 잔잔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녀는 ‘생존 예술(Survival Art)’이라는 개념을 창시하여, 쉽게 구할 수 있는 일상적인 재료와 버려진 폐기물을 활용해 수선하고 치유하며 연결하는 바느질 작업을 통해 여성의 연대와 페미니즘 운동과도 연결된 메시지를 전한다.
또 다른 조각 작가 마리안 베렌오(Marianne Berenhaut)는 사회 속에 남아 있는 손상과 트라우마, 부조리함을 작품으로 표현한다. 길거리에서 수집한 재료로 강렬하면서도 연약한 \조각을 만들어내며, 상실과 기억을 담은 그녀의 작품은 전시의 깊이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전시장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요소 중 하나는 브뤼셀에서 활동하는 젊은 디자인 그룹 ‘아이고(Aygo)’의 가구들이다. 1996~99년생 디자이너 네 명이 모여 2022년에 결성한 이들은 독창적인 호스피탈리티 디자인을 선보이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2024년 9월, 이들의 작업을 ‘가장 파괴적인 예술적 실험’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펠라지 그바구이디는 2024년 4월, 이들이 운영하는 ‘에스파스 아이고(Espace Aygo)’라는 아뜰리에를 방문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들이 제작한 파피에마셰 벽 선반, 우레탄 고무로 코팅한 욕조, 재활용 목재를 깎아 만든 화병 등은 원초적이면서도 혁신적인 공간을 창조했다. 이들의 작업 방식은 현대 사회의 모순을 꼬집고, 예술적 혁명을 통해 문제 해결을 모색하는 그바구이디의 철학과 맞닿아 있다.
결국, ‘앙트르(Antre)’ 전시는 단순한 은신처가 아니라,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출구를 제안하는 공간이다. 세대와 인종을 초월한 예술적 대화는 우리의 시야를 확장시키며, 각기 다른 시대의 작가들이 공유하는 동질성을 발견하는 과정에서 세대 간 소통의 필요성을 깨닫게 한다. 그 속에서 우리는 예술이 제공하는 치유와 회복의 힘을 경험하게 된다.
Information
앙트르(Antre)
장소 라 베리에흐La Verrière
기간 2025년 1월 15일 – 3월 29일
운영 시간 화요일-토요일(12:00 ~ 18:00) *무료입장
웹사이트 홈페이지
자료 제공 및 협조 에르메스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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